Updated : 2024-09-30 (월)

(장태민 칼럼) 공무도하가

  • 입력 2024-09-24 11:09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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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필자가 학창 시절에 배운 한국 시가 가운데 가장 오래된 노래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였다.

고조선 시대 뱃사공 곽리자고(藿里子高)의 아내인 여옥(麗玉)이 지은 노래라고 배웠다.

공무도하가는 고구려의 유리왕이 지은 황조가 등과 함께 문헌으로 남아 있는 고대 가요 중에 가장 오래된 서정시다.

최근 난데 없이 한 지인이 학창시절에 배워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 오래된 시가를 불렀다.

정부와 정치권,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찬성했던 의대 증원 문제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공무도하가에 담았다.

지인은 21세기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조선시대 기득권층이었던 '성리학자'들과 같은 부류인 만큼 이 노래는 고관대작들도 다들 알 것이라고 했다.

지금의 학생들은 굳이 이런 노래를 배우지 않길 바랬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 노래가 현재의 의료사태와 오버랩 돼 슬픔을 배가시켰다.

■ 한국 의료시스템에 보내는 조사(弔辭)...21세기에 부르는 공무도하가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은 기어코 물을 건너셨네(公竟渡河).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墮河而死).

가신 님을 어찌할꼬(當奈公何).

필자의 지인은 한국의 성리학자들이 뻔히 결과가 정해진 일을 기어이 밀어붙이고 있다면서 노랫말을 좀 바꿔서 다시 부르기도 했다.

님아(국민 다수, 정부, 정치인), 의료 개혁 제발 그만 두시오.

님은 기어코 개혁을 밀어붙이셨네.

잘못된 개혁에 한국 의료 시스템 붕괴되고 한국 사람들 돌아가시니.

망가져버린 세계 최고의 의료 시스템을 어찌할꼬.

■ 문제 풀 의지 없어 보이는 정부

올해 2월부터 시작된 의료 사태가 반년을 훌쩍 넘었다.

필자가 볼 때 지금은 '매몰비용 처리와 문제해결의 시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부에겐 결자해지하려는 마음이 없어 보인다.

추석 연휴가 지난 뒤에도 정부에겐 진지한 협상의 태도가 없어 보인다.

의료계에 '합리적인 단일안을 내놓으라'는 식의 발언을 몇 개월째 반복하고 있다. 정부의 변함 없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일부러' 이러는 것 아닌가 의심이 든다.

이미 수개월째 확인하지 않았는가. 의료계에 단일안이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의료계 내 이해관계도 다 다르다. 전공의들은 의협마저 신뢰하지 않는다.

결자(정부)가 해지해야 하지만 결자는 뒷짐 지고 마음에 드는 답안을 가져오는지만 보겠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의료 시스템이 붕괴되고 있지만 여전히 정부, 정치권 등은 꽤나 여유가 있어 보였다.

추석 연휴 때 '큰 사고'가 없었다고 자평을 하기도 하는 등 '책상물림 조선 선비'들의 정책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국 성리학자들의 이런 접근이 필자에겐 공포로 다가온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기에 정부가 의사들의 화를 돋우면서 '책임 떠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면 한숨만 나온다.

정부(법조)는 이른바 '의료계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유포했다는 죄목까지 씌워서 전공의를 구속하기까지 했다.

정부는 이번 사단을 일으킨 주체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책임을 의사 집단에 떠넘기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의대 증원, 25년부터 백지화해야...현실의 절박함 외면하는 정부

조규홍 복지부 장관, 이주호 교육부 장관 등 정부 관료들은 추석 전후 계속해서 2025년 의대 정원은 조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제 수시 모집 원서 접수가 마감됐기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혼란을 준다고 했다.

정부는 정말 내년 의과 대학 수업이 제대로 될 것으로 보는 걸까. 필자가 보기엔 지금은 '내년 수시 따위'가 중요한 시기가 아니다.

내년 의대 총 모집인원이 4,610명(1,509명 증원)인 데다 올해 학교를 떠난 3천명까지 포함하면 7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교육을 받아야 한다.

이미 의대 교육 시스템에도 큰 상처가 났고 지금은 피해를 최소화하는 게 중요한 시기다.

의대 교수들은 대학을 떠나고 의대 학생들과 전공의는 배움을 중지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대폭 늘어나는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는가? 필자가 볼 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정상 교육이 불가능한데, 정부는 여전히 문제 없다고만 한다.

한국 관료들이 언제부터 '어벤저스'가 됐는가.

올해 의대, 전공의 교육도 이미 파행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전국 의과대학생들의 24학년도 2학기 등록률은 3.3%에 불과했다. 교수들은 가르치는 일을 중지하고 학생들은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이다.

교육부의 ‘전국 의대생 등록현황(9월2일 기준)'에 따르면, 전체 19,374명의 재적생 중 653명(3.3%)의 의대생이 24학년도 2학기를 등록한 것으로 확인됐다.

단 1명의 의대생도 24학년도 2학기 등록 신청을 하지 않은 대학도 있었다. 국립대의 경우 2곳, 사립대의 경우 7곳에서 단 1명의 의대생도 등록을 하지 않았다.

이미 24학년도 1학기(7월 22기준) 의대생들의 출석률은 2.7%에 불과했다.

의대생들은 대규모 유급 사태를 넘어 제적에 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이주호 장관 말처럼 앞으로 '더 수준 높은 의학 교육이 이뤄진다'고 믿어야 할까.

정부가 하는 이런 말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뇌를 점검해 보길 바란다. 이미 한국의 의료 시스템, 의학 교육 시스템 모두가 망가지고 있다.

■ 성리학자들의 고집이 망가뜨린 '한국 의료시스템'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개혁이 필요했다. 이 부분은 의사 집단들도 동의하고 있었다.

정부는 필수 의료, 지방 의료를 살리기 위해 이 '개혁'을 한다고 했다.

그러면 답은 나와 있다.

필수의료 분야 수가를 현실화하고 '말도 안되는' 법률 리스크를 낮춰주면 될 일이었다.

정부 말대로 '낙수' 의사가 제기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10년 훌쩍 지난 뒤의 일이다.

사실 한국은 OECD 국가 중 의사수가 가장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였다.

고맙게도 전공의, 필수 분야 의료진 등이 낮은 수가에도 중노동을 하고, 나이든 의사들도 은퇴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은 '위태롭지만' 세계에서 가장 가성비 좋은 의료 시스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사실 필수분야 의료진 등 중 상당수는 비필수 분야의 의사로도 큰 돈을 벌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돈만 밝힌다'는 정부와 정치인, 그리고 다수 일반인들의 통념과 달리 많은 필수 분야 의료진들은 소위 '바이탈뽕'(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때의 보람)에 취해 자신의 젊음을 갈아넣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정부의 주장과 달리 필수 의료 전문의가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돈이 안되고 리스크가 크니' 필수 의료 분야 의사가 자기 전공을 살리지 않고 다른 진료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수가를 현실화하고 법률 리스크를 낮춰 필수 분야 메리트를 높이면 될 일이었다.

사실 답은 나와 있는데 정부는 계속 다른 답만 요구한다.

이러다보니 이번 사태 초기부터 의심을 받았던 수도권 6,600 병상 확보와 관련한 특정 병원 집단의 이권, 실비보험과 관련한 민간보험사의 이권 등이 의심 받는 것이다.

의대생들을 대거 뽑아 새로 출범할 '수도권' 병원에 싸게 공급하기 위한 기획 아니었느냐는 얘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황당한 사회수석

지난 19일 대통령실은 사직 전공의 33%가 다른 의료기관에 재취업해 '의료 현장으로 복귀했다'는 이상한 발표를 내놓았다.

정부는 이날 ‘응급의료 등 비상진료 대응 브리핑’을 통해 전체 전공의 1만463명(사직 전공의 8,915명) 중 1,090명이 출근 중이며 2,940명이 재취업했다고 밝혔다

재취업한 사직 전공의들은 아직 수련 과정을 마치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의 자격으로 일하고 있다.

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은 "수련병원에 복귀한 레지던트 1천여명까지 포함하면 전체 레지던트 약 1만명 중 40%가 의료 현장으로 이미 돌아와 있는 것"이라고 했다.

장 수석은 "이들 중 상급종합병원 50명, 종합병원 500명, 병원급 500명 등 1,050명이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에서, 나머지는 요양병원·치과병원·동네의원 등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전공의가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한 게 아니라 수련환경과 의료체계가 제대로 변화한다면 복귀해 수련을 이어가고 싶어 한다는 방증"이라고 했다.

하지만 의협은 이런 발표에 대해 "황당함을 넘어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의협은 "전체 전공의 1만3,531명 중 수련병원 211곳에 출근한 전공의는 1,202명에 불과하다"면서 생활을 위해 재취업에 나선 것을 의료 현장 복귀라고 주장하는 정부의 태도를 납득하기 어렵다고 했다.

꿈을 갖고 더 좋은 의사가 되길 원했던 전공의들의 상당수는 '수련'을 포기하고 '일반의'가 될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두고 의료 현장 복귀 운운하는 것은 낯 뜨거운 일이다.

올해 2월 박민수 복지차관이 전공의 사직금지 공문을 보내면서 직업선택의 자유에 메스를 댔다. '역대 가장 힘센 차관'은 전공의들의 자존심을 짓밟아버렸으며, 전공의들의 상당수는 전공을 포기해버렸다.

■ 경제학 공부한 사람들도 '조선 선비'가 되는 기막힌 현실...다시 '공무도하' 읍소

사실 복지부, 교육부 공무원들의 발언을 듣고 있으면 이들이 '21세기에 사는 관료'가 맞나 하고 의심하게 된다.

이들이 얼마나 도덕적인지 모르겠으나, 말 끝마다 의사들에게 '도덕, 명분, 히포크라테스' 등을 들먹이는 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내젓게 된다.

조규홍 장관, 박민수 차관 등이 의료 분야에 문외한인 것은 그렇다 치자. 황당한 것은 경제학을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말 끝마다 조선시대 성리학을 토대로 이 문제에 접근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심지어 하버드에서 경제학 박사를 했다는 국무총리마저 '의료 개혁 완수'를 다짐하면서 전공의들에게 책임 떠넘기기에 몰두하고 있어 답답할 따름이다.

지난 9월 12일 국회에 나온 한덕수 국무총리는 '고통받는 국민 위해 사과할 생각 없느냐'는 질문에 "사과할 생각 없다"면서 "지속가능한 최고 의료 수준을 가진 국가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의 사태는 "전공의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했다. 도덕군자의 면모도 숨기지 않았다.

총리는 "세계 어디든 중증환자와 응급실을 떠나는 의사는 없다"고 했다.

이런 식의 태도로는 이 문제를 풀 수 없다. 감정의 골만 깊어질 뿐이다.

지금의 문제는 단순하게 풀어야 한다. '알렉산더의 매듭'이 필요한 시기다.

이미 안타까운 시간, 엄청난 국민의 돈이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번달엔 무려 6천억원이 넘는 국민의 돈(건보재정)이 소진될 예정이라고 한다.

안타깝지만 이런 시간과 비용을 모두 '매몰비용'으로 처리한 뒤 원점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런 뒤 처음부터 다시 논의하는 게 상책이다.

이번 의료 개혁(혹은 개악·농단)의 결말도 '한국 최초의 시가'처럼 처연한 비극이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한국 의료가 백수광부의 강, 레테의 강을 건너버린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시를 매듭짓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시가의 첫 문장만 반복해서 불러본다.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님아, 제발 그 물을 건너지 마오(公無渡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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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최근 의료계의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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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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