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장태민 칼럼) 중앙은행 총재의 대통령 권한대행 지원사격
이미지 확대보기[뉴스콤 장태민 기자]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겸 경제부총리 겸 기재장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이 총재는 2일과 3일 두 차례의 신년사를 통해 "전례없이 정치·경제적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통화정책은 상황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고 기민하게 운영될 필요가 있다"면서 정치에 대해서도 한마디했다.
총재의 한 마디는 지금은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에 힘을 실어줄 때라는 것이었다.
■ 최상목에 힘 실어주는 이창용
한은 총재가 신년사를 통해 '정치인과 정부 관료의 자성'을 촉구한 데는 이 문제가 한국의 대외신인도와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총재는 정치가 계속 혼란을 거듭하는 이상 통화정책만으로 경제를 안정시키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외신인도는 결국 '외부가 한국을 보는 눈'과 관련돼 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한국경제는 문제 없다고 외치더라도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는 이상 외국인 투자자 등은 한국을 의혹의 시선으로 볼 수 밖에 없다.
이 총재는 "최근 들어 국제사회의 관심이 금융·외환시장 불안을 넘어 국정 컨트롤타워가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로까지 확대됐다"면서 "정치적 갈등 속에 국정공백이 지속될 경우 대외 신인도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경제 전반에 직간접적으로 충격이 더해질 수 있어 국정 사령탑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치적 불확실성에 따른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통화정책을 포함한 경제 시스템 전반이 정치적 프로세스에 영향받지 않고 독립적·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최근 최상목 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등에 대해서도 힘을 실어주는 발언을 했다.
야당 뿐만 아니라 여당 내에서도 최 대행의 '권한 행사'에 대해 불만이 적지 않았지만, 총재는 경제를 신경써야 하는 입장임을 이해달라고 자원사격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총재는 "정치적 이해 관계에 따라 평가가 다르겠지만, 최상목 권한대행은 대외 신인도 하락과 국정공백 상황을 막기 위해 정치보다는 경제를 고려해서 어렵지만 불가피한 결정을 했다"면서 "이는 앞으로 우리 경제 시스템이 정치 프로세스와 독립적으로 정상 작동할 것임을 대내외에 알리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여야가 국정 사령탑이 안정되도록 협력해야 할 때"라며 "이 과정에서 한국은행도 풍랑 속에서 중심을 잡고 정부 정책에 조언하며 대외 신인도를 지켜내는 방파제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 F4의 인연, 중앙은행 총재의 '한국정치 이래선 안 돼...최상목 도와야'
이창용 한은 총재는 역대 어떤 중앙은행 총재보다 정부와 자주 소통하고 있다.
매주 F4(기재장관, 한은 총재, 금융위원장, 금감원장) 회의에 참석하는 데다 계엄사태 이후엔 매일 정부 경제관료들과 만나서 논의를 하디시피 했다.
최근엔 정치가 초래한 한국경제 위기 상황을 맞아 더욱 관계를 긴밀히 한 것이다.
결국 여당, 야당, 대통령실 등이 최 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비판할 때 한은 총재가 그의 곁에 서서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중앙은행이 정치적으로 예민한 발언을 해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받았다.
총재가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IMF 등 해외에서 오랜기간 일한 '국제인 이창용'의 감각 때문이기도 하다. 일각에선 한은 총재가 평소에 지닌 '정치적 욕심' 때문이라고 오해(?)하기도 했다.
아무튼 한은 총재는 한국 정치가 이대로 가다가는 대외신인도 하락이라는 우려가 현실화될 수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결국 전날 총재는 신년사를 낭독하다가 대놓고 한국정치를 비판하는 작심 발언을 했다.
"간부들이 더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한마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최 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결정에 대해 비판을 할 때는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을 경우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지에 대한 답도 같이 하는 게 좋겠습니다."
급기야 한은 총재는 국무위원들을 대놓고 비판했다.
"특히 국무위원들은 (최 대행의 결정에 대한) 그런 비판이 해외 신평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고려해 주셨으면 합니다. 신용등급은 한번 내려가면 다시 올라가기 굉장히 어렵습니다."
총재는 기자들 앞에서 '최 대행의 고뇌에 찬 결단'을 칭찬하는 언사도 내놓았다.
"최 대행은 (이번 결정으로) 공직자로 나중에 크게 평가받을 것입니다."
■ 정치는 경제를 위해 '봉사해야' 하는데...상부구조가 망치는 하부구조
칼 맑스는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봤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맑스의 말대로 생산력과 생산관계 등 경제적 생산양식이 그 사회의 정치, 종교 등 각종 상부구조의 제도들을 결정할 수 있지만, 상부구조가 반드시 수동적인 위치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최근의 사태 등에서 보듯이 한국사회에선 상부구조가 하부구조에 치명타를 가하기도 한다.
필자가 볼 때 정치는 본질적으로 경제의 하부 영역이다.
정치는 국민들이 경제 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정치는 경제주체 상호 간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일, 즉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에 방점을 둬야 한다.
또 정치가 가야 할 길은 국가 경제 전체가 잘 되는 방향이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정치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문제 야기를 목표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국에서 정치는 특정 집단만의 이익을 위하거나 전체 경제가 망가지는 길을 택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선 여당, 야당, 대통령실 모두 권력투쟁에만 눈이 멀어 경제를 망치는 데 앞장서기도 한다.
지금은 중앙은행 총재까지 나서서 정치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릴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한국 정치가 위태롭다.
■ 우리 밖에 있는 또 다른 상부구조
대외 의존도가 큰 한국경제는 늘 남의 눈치를 봐야 한다.
우리가 내부적으로 한국경제는 아무 문제 없다고 외치더라도 '우리 외부의' 상부구조(미국 등 글로벌 경제 주도국가, 신용평가사 등)가 한국을 마음대로 규정해 버릴 위험이 있다.
이미 일부 해외 신평사는 몇 년 전 한국의 부채 증가속도가 과도해 자제하지 않으면 신용등급을 내릴 수 있다는 경고를 준 적도 있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상호작용은 한 국가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국가간에도 일어난다.
'국제인' 이창용 한은 총재가 한국 정치에 대해 쓴 소리를 한 이유는 이대로 가다간 외부의 상부구조가 한국의 상·하부 구조 모두 '규정'해 버릴 수 있다는 경계감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안 그래도 현재 한국 산업은 큰 위기에 처해 있다.
트럼프 2기를 코앞에 두고 한층 강도가 높아질 미-중 경제패권 전쟁 2라운드가 열리기 직전이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중국은 마치 한국 주력산업을 고사시키기 위해 큰 마음이라고 먹은 것처럼 반도체, 석유화학, 철강 등의 분야에서 과잉생산물을 덤핑처리하고 있다.
글로벌 수출입 시장에서 한국산이 경쟁하기 더욱 어려워졌다. 한국 내부에선 중국 저가품에 대한 관세 부과 등에 대한 논의도 별로 없는 듯해 딱한 느낌이 든다. 또 한국 정치는 참으로 혼란스러운 동시에 참으로 한가롭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정치가 할 일은 한국 하부구조가 망하지 않도록 결정하는 일이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본연의 일엔 나몰라라 한다.
우리는 세상 흐름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어 계엄이 가능하다고 착각했던 대통령, 대통령의 본 헤드 플레이를 권력을 쥘 수 있는 찬스로만 활용하려는 야당, 이런 와중에 이젠 어떤 권력자에게 줄을 대야 할지에만 관심있는 여당 등 '권력 쥔 얼간이들'만 잔뜩 구경하고 있다.
계속해서 이런 우울한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한국에선 상부구조의 위기가 하부구조를 완전히 망쳐버릴 수도 있겠다는 걱정마저 든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