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 2024-09-17 (화)

(장태민 칼럼) 성리학자들의 의료개혁

  • 입력 2024-09-04 15:13
  • 장태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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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콤 장태민 기자] 전날 한덕수 국무총리가 국회 예결위에 출석한 뒤 한 발언을 듣고 깜짝 놀랐다.

한 총리는 전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 출석해 "국민 불안은 중증 환자와 난치병 환자를 떠난 전공의가 제일 먼저 잘못된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필자가 볼 때 국정을 총괄하는 총리라면 지금과 같은 의료 위기에선 비난이 아니라 '문제 해결'에 중점을 둬야 했다.

정부가 연초 뜬금없이 2천명 의대 증원으로 시작한 의료 갈등이 반년째 이어졌지만, 총리가 여전히 전공의 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정부의 오만함...'나만 옳다'

정부의 많은 인사들처럼 총리도 '의료계'가 잘못했다고 주장했다.

총리는 "(의료계의) 의대 정원을 1명도 늘릴 수 없다는 입장이 강했다"면서 이번 한국 의료시스템 '위기'에 대해 정부 잘못이 아니라는 듯이 답했다.

심지어 이번 문제와 관련해 "정부로서는 엄청나게 양보한 것"이라고 했다.

아울러 의료시스템의 어려움은 인정하지만 일각에서 얘기하는 '한국 의료 시스템 붕괴 위기' 등에 대해선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현재 어려움의 탓을 '정부 뜻대로 따라오지 않는' 의료진에게 돌렸다.

총리는 "의료시스템이 붕괴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어려운 것은 사실"이라며 "1만명의 전공의가 떠난 데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필자는 지금은 정부가 책임소재를 엄격히 따지면서 '내탓네탓'을 하기 보다 '문제해결' 능력을 발휘할 때라고 봤다.

좀더 솔직히 필자의 의견을 말하면 2학기가 시작되기 전 정부가 전격적으로 '의대 증원'을 철회하길 바랬다.

정부가 당초 내세웠던 2천명 증원 논리는 보는 관점에 따라 전혀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었다.

의료계, 그리고 이 문제를 관심을 갖고 지켜본 상식 있는 사람들 중에도 '정부와 국민 다수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필자 역시 당초 2천명 증원은 필요 없다고 봤다. 아울러 여타 다른 문제를 파생시킬 수밖에 없다고 봤다.

한국 의학 교육 시스템을 감안할 때 의료의 질 저하는 불가피할 것으로 봤다. 또 '젊은층이 부족한' 한국의 교육 혼란, 첨단 산업 인재 양성의 어려움 등 여러가지 부작용이 불가피하다고 봤다.

하지만 정부는 그간 2천명 증원에 대한 '방정식'을 제시한 적이 없다.

심지어 참고했다는 논문의 저자마저 '자신은 2천명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했다. 여전히 이 '2천명' 미스터리는 풀리지 않고 있지만, 정부는 무조건 옳다고만 한다.

■ 성리학자들 내치지 않으면 의료시스템 더 위험해진다

한덕수 총리는 전날 조규홍 복지장관을 해임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열심해 해서 의료개혁 완수할 때이지, 사람 바꿀 때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대통령과 총리는 연초부터 의사를 악마화하면서 '의료개혁'을 지휘하고 있는 조규홍 장관, 박민수 차관 등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하지만 정부는 '낙수의사', '의새', '돈만 밝히는 자들'이라는 낙인을 찍고 의료 개악(!)을 밀어붙인 무능한 공무원들을 두둔했다.

정부는 상반기 내내 끊임없이 '생명을 다루는 의사가..." 따위의 고고하지만 성리학자나 하는 말을 쓰면서 의사들에게 '도덕적, 당위적' 차원에서의 복귀를 종용했다.

하지만 필자는 성리학이나 윤리학이 사회 갈등을 푸는 경우를 거의 본 적이 없다.

의료 현실을 알지 못하는 성리학자들은 여전히 대통령, 총리 등 최상급 공무원들의 열렬한 지원을 등에 업고 의료계를 밀어붙이고 있다.

■ 대증요법, 한계 있다...성리학, 윤리학의 틀을 벗어던져야 해법이 보인다

필자는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지금까지의 의대 증원은 '없던 일'로 하고 새롭게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면 입시 혼란은 어떻게 하느냐고 얘기하지만, 다른 혼란에 비하면 한 차례의 입시 혼란은 '사소한' 문제라고까지 생각했다.

이미 한국 의료나 의대 교육 관련 혼란은 불가피하던 상황이었다. 이번 의정 갈등의 파장이 일으킨 상처를 치유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하지만 정부는 6개월의 시간을 허비하면서 상황만 더 악화시켰다.

향후 국민의 돈은 돈 대로 더 낭비되고, 국민의 목숨은 더욱 위태로워질 것이며, 의료 시스템은 이전보다 더 취약해질 것이다.

하지만 정부가 느끼는 '위기 의식'은 현장과 큰 차이가 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땜질' 처방을 통해 또다른 위기를 만들고 있다.

의사들 사이에 공공의 적이 된 사람이지만 '역사상 가장 힘 세고 무서운 차관' 중 한 사람인 박민수 차관은 9월이 돼서도 단호해 보였다.

전날 박 차관은 응급실 곳곳의 진료 차질 우려에 대해 "붕괴를 우려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부' 어려움은 군의관, 공중보건의 등을 긴급 배치해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그러면 우리의 젊은 군인들과 시골의 노약자들은 누가 돌보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군의관 등을 응급실 현장에 배치하면 그들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역할이나 하지 않을까 우려스러웠다.

성리학자들은 현장을 모른 채 고담준론이나 떠드는 자들이다.

■ 성리학이 의학·과학을 이기면 나라는 위험해진다

사실 정책가들이 보여주는 대응 방식에 신물이 난다.

지금까지 정부 관료들이 취한 방식을 보면 일단 '밀어붙이기',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대증요법'으로 대응하기였다.

그리고 가끔씩 젊은 의사들을 구슬리기 위해 '국민 돈'으로 선심 쓰는 척했다.

정부의 소위 '개혁'으로 한국 의료시스템이 얼마나 개선될 지 모르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던 의료 서비스의 '가격'은 계속 올라가는 게 눈에 보인다.

그리고 권력은 있지만 디테일은 없는 각종 아마추어들이 의사들을 약올리면서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

여전히 21세기 한국에서 '성리학'은 높은 위상을 차지하면서 '의학과 과학'을 압도하고 있다.

지난달 중순 국회 복지위에서 의료 관계자들을 불러서 실시했던 질의에서도 한국의 관료와 정치인들은 무서웠다.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국사회에 '전체주의' 망령이 싹튼 것 아닌가 싶어 겁이 났다.

지난달 16일 조정훈 국민의힘 의원이 "전공의 90% 이상이 빠져 나갔다. 응급의료서비스 배후 진료가 작동되지 않아 차질이 발생했다"면서 "의사들이 필수·응급 의료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문제"라고 다그쳤다.

월드뱅크에서 근무했다는 글로벌한 의원마저 성리학적 잣대를 들이대며 의사들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는 머리를 감쌀 수밖에 없었다.

정치인, 정부 관료 등은 의사들을 돈만 밝히는 부도덕한 자들로 몬 뒤 문제가 생기자 '도덕심'을 회복하라고 다그치고 있다.

필자는 여전히 의사들마저 함부로 대하는 권력자들을 보고 잔뜩 겁이 났다.

하지만 그들은 의료 현실을 모르는 아마추어들일 뿐이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이 나라를 망가뜨릴 때 쓰던 엉뚱한 처방전만 끝없이 읖조리고 있다.

9월이 됐다. 2학기가 시작됐다.

한국의 의료 교육 시스템에 난 상처가 점점 커지고 있다.

의사 양성과 배출 시스템을 고칠 만한 능력이 있는 공무원도 없어 보인다. 군의관, 공보의 등은 '땡빵 의사'가 되고 이제 이들이 하던 일을 누군가 또 땜빵을 해야 한다.

정부가 의사 집단을 이기면 과연 이 나라 국민들은 더 나은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을까.

문제가 많았지만 그래도 전세계인이 부러워하던 '과거' 한국 의료시스템으로의 복귀도 멀어지는 것 같다.

세계사를 조금이라도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개혁이란 이름으로 진행되는 수없이 많은 '개악'이 있었다는 점을 알 것이다.

전문가가 빠진 개혁, 그리고 성리학자들이 주도하는 개혁은 늘 뒤끝이 좋지 않았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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