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12일 금통위 당시의 이창용 한은 총재
(장태민 칼럼) 시뮬라시옹
이미지 확대보기[뉴스콤 장태민 기자] 시뮬라시옹(Simulation).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현대인들은 '기호를 소비한다'면서 한 때 유행시켰던 개념이다.
필자의 기억으로 1990년대 초반 한국 대학가에서도 제법 인기가 높았던 보드리야르는 모사(模寫)된 이미지가 '진짜' 현실을 대체한다고 주장했다.
보드리야르는 더 이상 베낄 '사실'이 없어지면 사실보다도 더 사실적인 '하이퍼 리얼리티'가 생산돼 소비된다고 설파했다.
유럽 68혁명 세대의 낭만을 갖고 있던 철학자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이 문화를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방식을 특유의 위트로 잘 묘사했던 사람이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이렇다.
실재(實在)가 '파생된 실재'로 전환되는 작업인 시뮬라시옹 과정을 거쳐 모든 실재가 인위적으로 대체된다. 전환된 대체물이 시뮬라크르(Simulacra)이며, 사람들은 '가상 실재'인 시뮬라크르의 미혹에 빠져 살아간다.
조작된 실재, 즉 가상실재가 실재를 지배하고 궁극적으로 대체해 버리면서 포스트 모던한 세계가 창출된다. 그리고 우리는 하이퍼 리얼리티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 김중수 총재가 했던 고민
과거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2010년 4월~2014년 3월)가 총재 재임 시절 중앙은행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한 했던 얘기가 떠오른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 나지 않지만 김 총재는 재직 당시 "마크 카니 캐나다 총재가 '중앙은행 총재의 말보다 언론의 보도가 더 중요하다'고 하더라"라고 말한 적 있다.
마크 카니는 캐나다 중앙은행 총재를 역임한 뒤 영국으로 건너가 영란은행 총재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중앙은행이 생각하는 '통화정책 방향'보다 미디어라는 도관(導管)을 통해 금융시장, 일반인 등에게 제시되는 '이미지'가 상당히 중요하다는 점을 거론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제품의 기능이 아니라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처럼, 중앙은행이 '진짜로' 나가려는 방향이 아닌 언론이 '왜곡한' 중앙은행에 대한 이미지를 많은 사람들이 소비한다는 점을 거론한 것이다.
당시 김 총재는 자신이 얘기하려는 의도와 다른 '총재의 말'이 금융시장, 온라인 사이트 등에서 확대재생산되는 과정을 보면서 다소간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고민이 중앙은행 총재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고민임을 인지했다.
언론이라는 족속들은 중앙은행가들의 속마음을 이해하려고도, 배려하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사실 언론은 이해력도 부족한 상태에서 뭐든 단순화해서 이미지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려고 애쓴다. 이후 언론은 소비자의 반응 정도를 보면서 다시금 왜곡된 이미지를 재생산하면서 사업을 영위한다.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오래전에 갈파했던 '현대인의 (진실 대신) 이미지를 소비하는 버릇'은 단순한 주장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 비밀 사원 교주에서 커뮤니케이션 전도사가 된 중앙은행
사실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관련 커뮤니케이션이 명료해야 하는지, 애매해야 하는지를 두고 오랜기간 논박이 오갔다.
애매모호한 커뮤니케이션이 유행하던 시절 앨런 그린스펀은 유명한 말 장난을 치기도 했다.
오랜 기간 연준 의장을 지냈던 그린스펀은 "내말이 분명히 이해됐다면 그건 나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라는 이상한 발언으로 사람들의 귀를 어지럽혔다.
당시만 하더라도 중앙은행가들은 마치 비밀 사원의 교주처럼 굴었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듯했다. 시장을 한수 지도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시장은 덩치가 커졌으며, 중앙은행가들은 시장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무시할 수 없게 됐다.
중앙은행은 몸집이 비대해진 시장을 일방적인 명령으로 지도편달할 수 없었다. 복잡해진 시장을 이해하는 것만 해도 버거운 일이었다.
오래전 장병화 전 한국은행 부총재는 "중앙은행의 리스크 중 하나는 복잡해진 금융상품을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로 시장에 대한 이해조차 쉽지 않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후 위기가 겹치면서 중앙은행가들은 알쏭달쏭한 말로 시장을 계도하기가 더욱 어려워졌음을 인지하게 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방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포워드 가이던스'가 유행했다.
중앙은행가들은 결국 좀더 확실한 정책 방향을 알려주고 시장의 동의를 구하는 방식을 선호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중앙은행 스스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 커뮤니케이션에 발목 잡힌 한은 총재...'내 말을 왜 잘라 먹어?'
하지만 불확실성이 큰 세계에서 구체적인 포워드 가이던스는 리스크를 진다.
경제환경과 관련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에서 정책방향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위험이 클 수 밖에 없다.
최근 이창용 한은 총재가 이런 어려움에 직면했다.
한은은 올해 7월 최초의 '빅스텝' 인상을 단행한 바 있다. 이 때 이 총재는 앞으로는 '특별한 조건 변화가 없다면' 25bp씩 인상하겠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이후 한은은 8월 25bp 인상을 하더니 10월에 50bp 인상을 단행해야 했다. 연준의 연말 기준금리, 그리고 최종 기준금리에 대한 예상치가 급격히 올라가 한은이 베이비 스텝으로 미국을 쫓아가기 버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에선 한은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25bp씩 올린다고 하더니 왜 50bp나 올리느냐고 비판한 것이다. 이창용 총재의 쉬원한 화법을 칭송하던 사람들이 얼마 지나지도 않아 강력하게 비난하기 했다.
예컨대 채권을 사고팔아 이익을 남겨야 생존하는 한 채권 딜러는 7월엔 "지금처럼 불확실성 큰 시대엔 이창용 총재처럼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낫다. 이주열 전 총재와 달리 명확해서 좋다"고 하더니 10월 회의 후엔 "총재가 경험 부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신뢰도를 깎아먹는다"고 비판했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탓인지 최근 이 총재의 발언은 이전보다 자신감이 떨어져 보였다.
총재 자신은 항변을 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자포자기하는 듯한 느낌도 줬다.
최근 총재는 10월 금통위의 50bp 인상을 시사하면서 당분간 25bp 인상한다는 발언은 '조건부'였음을 여러차례 상기시켰다. 이번주 금통위에서도 다시금 장황하게 설명해야 했다. 이창용 총재의 12일 금통위 발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지금까지 저희가 했던 포워드 가이던스는 조건부로 말씀드린 거고 7∼8월에 25bp 올린다고 얘기했다고 자꾸 그러시는데 그때 찾아보시면 9월 FOMC 결정을 보고 그것이 계속 갈지를 말씀드리겠다고 얘기했고, 9월에 FOMC에서 발표한 점도표가 저희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높았기 때문에, 그 예상을 왜 못했느냐 그러면 저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 사람들도 같이 비난을 받아야 되겠지만 그것이 바뀌었기 때문에 전제 조건이 바뀌었다고 말씀드린 것이고요."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반응도 보였다.
총재는 지난주 국회 국감에 이어 이번 금통위에서도 "포워드 가이던스에 대해 여러 비난(비판)이 있다. 지금 여기서 무슨 얘기를 하더라도 다 변명하는 것으로 들릴 것"이라는 자포자기성(?) 발언도 했다.
이창용 총재는 역대 한은 총재 중 최고의 엘리트로 평가 받은 인물이지만, 사람들이 '중앙은행의 내심'까지 이해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간과한 듯했다.
현대인들은 보드리야르의 말대로 '기호'를 소비한다. 한은 총재가 말한 복잡한 '조건'을 따지기 보다 나름대로 해석해서 구축한 '가상실재'에 의존해 판단을 하는 경우도 많다.
아직 중앙은행 총재 경험이 많이 쌓이지 않은 이 총재가 시뮬라시옹의 관점에서 화법(話法) 문제를 점검한다면, 그는 아마도 상처를 덜 받으면서 커뮤니케이션 기법을 가다듬을 수 있을 것이다.
장태민 기자 chang@newskom.co.kr